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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느 스티븐 포스터

一雲 2012. 9. 5. 20:04

Old Folks At Home / Mantovani Orchestra 

Old Folks At Home(스와니강) / 이인옥


My old Kentucky home / Marian Anderson

 My old Kentucky home / Roger Wagner Chorus

My old Kentucky home / Mantovani Orchestra

Oh! Susanna(오! 스재너) / 로버트 쇼 합창단


Old Black Joe(올드 블랙 죠) / Sojiro

Beautiful Dreamer (꿈길에서) / Mandy Barnett


Jeanie With the Light Brown Hair / 바이올린

Jeanie With the Light Brown Hair / 강화자

 

  

 
 

- 머나 먼 스와니 강물 그리워라-

 

헨리 정(35회 선배  전 한국일보 기자.정영진 , 재미 칼럼리스트)

 

“머나 먼 저곳 스와니 강물 그리워라

날 사랑하는 부모형제 이 몸을 기다려

이 세상에 정처 없는 나그네의 길

아~ 그리워라 나 살던 곳 멀고 먼 옛 고향“

 

언제 불러도 가슴을 촉촉이 적시어주는 향수 어린 곡-

언제 들어도 고향 그리워하는 애틋한 정감이 솟구치는 추억의 노래가 바로 “스와니 강” (원명 Old folks at home)이다.

미국 민요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이 노래는 우리가 일찍이 중학 시절<국민음악>이란 국민음악보급회 편찬, 문교부 검정 국정교과서에 실린곡 이라서 한국에서 교육받은 이전 세대치고 모르는 사람이 없이 애창하던 깊이 새겨진 회상의 멜로디이다.

중학 교과서 <국민음악>에는 그 밖에도 “켄터키 옛집” “오~수산나” “내 고향으로 날 보내 주” 그리고 “여수(旅愁)” “동무생각” “아-목동아~” 이태리 가곡 ‘오-솔레미오“ ”돌아오라 소렌토로“등이 수록되어 있었던 걸로 기억이 난다.

 

주옥같은 수많은 곡을 남기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작가 스티븐 포스터.

비록 그가 가고 없어도 지금도 우리들 마음속에 깊이 잠겨져 있는 그 아름다운 선율은 가슴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한세기 반이 흐른 오늘날까지 그 감동이 남아있다. 그래서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하는 명언이 생겼던가?

<사진출처:위키페디아>

 

 스티븐 포스터는 펜실바니아 핏치버그 근교에서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1826)

그는 게으른 탓이었는지, 아니면 자유 분망한 천성 때문인지 학교 교육은 단 2년밖에 다니지 아니하고 빈둥대며 자랐으며 음악교육이란 이웃 독일계 가정교사로부터 풀루트를 어릴 적에 배운 일 밖에 없었다. 그리고 늘 기타나 치고 소일하였다.

그가 20살이 되던 해 그는 오하이오주 신시내티로 가서 형이 운영하던 증기기관 선박회사에서 그저 장부 정리나 하며 젊은 시절을 보내었다. 

  그가 일하던 신시내티는 미시시피강 상류 강변도시로 그 시대 증기기관선이 발달하여 미시시피강은 수상교통이 활발하였기 때문에 남과 북의 유동인구가 많았다. 그때 그의 이웃에 한 소녀가 이주해 살았다. 얼굴에 기미도 끼고 별로 예쁘지는 않아도 명랑해 보여서 말을 걸었다.

“네 이름이 뭐니?”

“수산나 예요.”

“너 어디서 왔니?”

“알라바마에서 요.”

“그럼 여길 살로 왔어?”

“아니요, 루이지아나로 이사 갈 꺼에요.”

“내가 너를 위해 노래하나 지어 줄꺼나?”

“아이 좋아라!, 고마워요 아저씨.”

 

이처럼 장난끼 어린 순수한 마음으로 그 소녀를 위해 노래를 지어 준 것이 바로 유명한 “오~ 수산나”(1848). 가사는 그 소녀와 대화를 나눈 그대로-

“I came from Alabama banjo on my knee, I'm going to Louisiana Susanna for to see."

이 노래는 곧 힛트를 쳐서 전국에 퍼지게 되었고 때마침 캘리포니아에 금광 붐이 일어 일확천금을 꿈꾸는 많은 사내들이 서부로, 서부로 모여들 즈음 괭이를 맨 광부들이 우렁찬 행진곡처럼 골드러시의 주제곡이 되다 시피 불렀다.

 

1850년 그는 형의 회사를 그만 두고 별 계획도 없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당시 흥행이라는게 노래 부르고 춤추는 떼거리들이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며 마을마다 천막을 치고 공연하던 유랑극단이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백인들이면서 얼굴을 검게 분장하고 흑인 흉내를 내며 노래 부르던 유랑극단의 단장 크리스트 민스트럴이란 연예인과 친구처럼 지냈는데 그 악단이 자기 고장에 오게 된다는 소식을 듣고 포스터는 작곡을 하나 해서 그 친구에게 선사하겠다는 발상을 하게 되었다.  남북전쟁 이전 이미 일부 농장에서는 노예제도가 없어지고 노예로 일하던 흑인들이 하나 둘씩 자유직업을 얻기 위해 북으로 ,동북쪽으로 노동인구가 이동, 포스터의 고향에도 흘러들어 온 흑인들이 마부며 하우스보이, 소.말치기등 허드렛일로 일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포스터는 그들의 처지가 자기 일이 아닌데도 늘 가엾게 여겼고 그들이 옛 친구, 가족을 멀리 남쪽에 두고 이곳 낯선 곳에 와서 얼마나 고향 사람들을 그리워하고 부모형제가 보고 싶을까 하고 그 마음속을 자기 일처럼 아프게 여기며 동정해 왔다. 그래서 타향살이하는 흑인들의 고향을 기리는 마음을 노래로 읊어 보겠다고 구상을 하고서 친구 크리스트 단장이 도착하기 전 노래를 지어서 그의 악단보고 연주해 보라고 할 심산이었다.

 

포스터는 그의 생애에 총 189편의 노래를 작곡하였지만 그 가사도 대부분 그가 스스로 지었다.

기타를 무릎위에 얹고 악보 앞에 앉은 포스터는 가사를 손수 짓고 기타 줄을 두들기며 새 노래 창작에 열중하면서 옆에 있던 형에게 물어 보았다.

“형, 이번 노래의 둘째 음절에 들어 갈 적당한 강 이름이 없을까?.”

하고 조언을 구하니 형이 생각난다면서 던져준 강 이름은 미시시피강 한 지류인 Yazoo가 어떠냐고 대답해 주었다.

“에이 그건 싫어, 다른 머나 먼 강 이름이 없을까?.”

형이 잠시 생각해 보더니

“멀리 있는 강이라면 사우스 캘로라이나에 있는 Pee Dee강은 어때?.”

“그것도 별로 인데-.”

하고 탐탁치 않은 표정을 지으니 형은 지도를 펴 들고 멀고 먼 강이라면 더 남쪽을 한번 찾아 보자 하며

“야아-, 여기 좋은 강 이름이 있네-, 스와니(Suwannee)강 어때?.”

“그것 참 좋네요. 스와니 강이라-”하고 악보에 받아쓴다는 것이 소리 나는 데로 <Swanee 강>이라고 스펠도 맞지 않게 가사에 적어 넣었다.

그래서 그가 창작한 가사에는 둘째 음절이 Swanee 강으로 정해 버렸다. 그러나 지금도 그 강의 공식 이름은 Suwannee이고 다만 그가 스펠을 틀리게 적은 탓으로 그 곡명을 어디에서나 Swanee 강으로 통한다 .그 노래의 원 제목처럼 Old folks at home이 맞는 곡명이다.

“머나 먼 스와니 강물 그리워라- (Way down upon the Swanee River far, far away)."

그는 다른 음악가가 작곡할 때처럼 머리를 싸 메고 그 선율의 영감을 얻기 위해 심사숙고, 고심, 심혈을 기울려 하는 게 아니고 그저 장난처럼 술술 악보에 생각나는 대로 지어 나갔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선율의 탐미력이 천재적이었다.

 

포스터는 평생 후로리다에 여행 해 본적도 없기 때문에 스와니 강을 본적도 없다. 그저 환상의 강이다.

이 노래 “스와니 강”은 어느덧 유럽에 까지 퍼져 영국군 병사들이 크리미아 전쟁(1854~1856. 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이 종군))때 머나 먼 흑해 연안 크리미아에서 고향과 부모형제를 그리며 목이 메이도록 합창하면서 눈물짓던 노래가 되었었다.

 

포스터는 고향으로 돌아 온지 얼마 만에 그 읍내에서 유지로 통하는 어느 의사의 딸과 결혼, 이듬해에 딸을 낳았다.

그 신부의 이름이 제인 맥다웰, 그는 그후 아내를 주제로 “금발의 제니“라는

불후의 곡을 작곡했고 그들이 신혼여행으로 켄터키 주에 사는 숙모집에 찾아 갔을 때 뒷뜰의 옥수수 밭을 보고 “켄터키 옛집”을 작곡하였다.

연애하던 시절 아내가 될 처녀를 항상 마차에 태워 데려다 주고 데리고 가던 마음씨 착한 흑인 마부가 있었는데 그의 이름이 죠(Joe), 애인이 예쁘게 보이니까 그녀를 싣고 오는 마부도 곱게 보여 그를 위해 지은 노래가 “늙은 흑인 죠(Old black Joe)”이다.

이와같이 그가 작곡하여 만인의 사랑을 받은 명곡들이 모두 자기 주위에서 보고, 느끼며 얻은 감동을 즉흥적으로 주워서 지은 노래들이다.

 

1846년부터 그가 죽을 때까지 자신이 지어서 음악 출판사에 넘겨 준 대가로 받은 저작권료와 인세는 모두 15,000불이나 되었으나 그걸 다 어디에다 허비하였는지 그는 늘 가난했고 도무지 살림이나 이재 관리에 무관심 했다.

그는 돈 욕심도 없어서 저작권료를 빅돌 유고(레미제라블,노틀담의 곱추의 작가)처럼 욕심껏 챙길 생각도 아니하고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처럼 특허권료에서 나온 돈을 잘 관리하는 이재 능력이나 재테크닉이 전무하였다.

주면 받고 안 주면 말고...하는 식으로-, “스와니 강”의 곡을 펴낸 악보상은 그게 50만부나 팔렸건만 겨우 15불만 받고 말아 버렸다.

이러한 그의 금전관과 방만한 생활 때문에 아내 제인과도 사이가 멀어져

1860년에는 처자를 내버려 두고 무작정 상경식으로 큰 도시 뉴욕으로 혼자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큰 도시에 왔으면 그의 포부를 편다 던가 대 작곡가로 발돋음 할 노력을 하지 않고 그저 무위도식하는 방랑자가 되다시피 되었다. 그리고는 음주를 즐겼다.

19세기 중엽 많은 예술가들이 청운의 꿈을 안고 대도시 뉴욕으로 몰려 들지만 예술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는커녕 매정한 도시의 인심과 생활비에 허덕이며 빈곤한 삶을 힘들게 살아 가며 춥고, 배고프고 영양실조로 병들어 고생하는 장면이 오 헨리의 단편 “마지막 잎새”에서 잘 묘사되고 있다.

포스터도 역시 그런 인생군(人生群)의 한 사람이었으리라.

대 도시 뉴욕에서 그의 희망은 이룩할 수 없었으며 그의 운은 이미 내리막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러나 그 불행 중에서 꿈의 이상을 노래한 "Beautiful dreamer"을 마지막으로 남길 수 있었다.

 

1864년 1월 10일, 대단히 추운 날이었다.

맨하탄 남쪽 거리, 이름은 근사한 Northern America Hotel이라고 간판은 붙었으나 가난뱅이들이 기거하는 하숙집이다.

그는 그곳에서 심한 감기로 고열과 기침 때문에 몹시 앓게 된다. 그래서 도와줄 아주머니를 부르러 침대에서 일어 나 화장실까지 걸어갔으나 몸을 가누지 못해 쓸어져 세면대에 머리를 부딪쳐 세면대가 깨지고 그 사기 조각들이 머리에 박혀 피투성이가 되었다.

주위사람들의 도움으로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심한 출혈로 입원 3일만에 37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고 만다.

 

자기의 마음은 항상 남의 심중에 있는 슬픔과 향수를 같이 나누어 그들의 마음을 대신 노래해 준 아름답고 고운 음악을 많이 남겼지만 그 자신의 생애는 자기 파멸적이고 자학적이었다.

천재는 뭔가 보통 사람과는 다른 데가 있는가 보다.

그는 자기 자신이 그처럼 소각돼가는 막다른 인생이었지만 남에게 대한 애정과 고운 마음씨는 세상 떠나는 날까지 간직하고 있었던 박애주의자였다.

그가 죽은 뒤 그의 주머니에서는 “다정한 친구들과 소중한 벗들에게-”라는 메모 쪽지가 발견되었다. 돈은 단돈 38센트. 그가 남긴 유산이었다.

 

스티븐 포스터를 기념하는 박물관은 핏치버그에 있다.

물론 그의 고향이니까 그를 기리는 마음에서 그곳에 있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후로리다 주에서는 그의 대표작 “스와니 강”이 자기네 주를 흐르는 강이라고 1935년 그 “스와니 강”을 주(州)의 주제곡(州歌)로 공표, 지금까지 주의 공식 곡으로 불리 우고 있다.

그리고 스와니 강가에 있는 마을 화이트 스프링에 스티븐 포스터 기념 박물관을 세우고 관광객을 끌고 있다.

지금도 일본이나 한국 관광객이 그 곡의 주제 강물이었던 스와니강을 찾아 그 노래의 낭만과 환상을 되 색임 하려고 드문드문 방문하기도 한다.

필자도 그중의 한 사람-. 몇 년 전 남부 후로리다로 여행 중 그 환상의 강을 꼭 보고 가겠노라고 Jacksonville에서 직진으로 남행해야 할 코스를 변경해서 하이웨이 10번을 타고 서쪽으로 차 머리를 돌려 그 그리운 스와니 강을 보고 가기로 마음 정했다.

고속도로를 두어시간 정도 달리니 지방도로 41번과 교차하게 되고 거기에서 북상, 30분 정도 가니까 White Spring이란 도시표시와 Stephen Foster Museum 이란 간판사인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스와니 강은 조지아 주 늪지대에서 발원하여 후로리다 서북 주경(州境)을 넘어 구불구불 감돌아 멕시코만으로 흐르는 볼품없는 강이었다. 미국의 산천에는 아름답고 경치 좋은 강들도 많고 많이 있건만 포스터가 그 노래 가사에 인용한 덕택에 일약 세계적 명소가 된 것이다.

강이라고 보기에는 강폭도 좁고 주위의 잡목 숲에 둘러싸여 경관도 없으려니와 조지아 늪지대를 지내오기 때문에 강물도 희멀거니 맑게 보이지가 않았다. 물이 흘러가는지 ,그냥 고여 있는지 도무지 유속(流速)을 느끼지 못하고 찾는 관광객도 없어 강물이 오히려 나를 물끄럼히 쳐다보며 무엇을 찾으러 여기에 왔느뇨 하고 묻는 듯 하였다.

 

아무튼 스와니 강을 포스터가 가사에 적어 놓는 바람에 포스터 작품의 본향(本鄕)은 바로 여기다 하고 펜실바니아와 후로리다가 서로 우김질을 하고 있으며 유명한 “켄터키 옛집”이 많이 불리우게 되면서 켄터키 주에서는 그 노래를 켄터키 주 공식 주제곡(州歌)로 정하였다. 주(州) 하나가 아전인수 격으로 하나 더 끼어 든 셈이다.

하지만 현재 미국의 젊은 세대나 청소년들 대부분이 이 불멸의 유산, 그 아름다운 곡들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