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

[스크랩] 옛 군추억 여행도 곁드린 양평 용문산 산행기(1 )

一雲 2010. 1. 18. 20:42

 

 

보시는 회원 님들께  조심 조심 사룁니다.

 

-이 글과 사진은 사뭇 개인적인 추억여행이어서  올릴까 말까 몇 번을 망서렸습니다.-

 

 외국여행도 좋거니와 우리 산하의 여행은 그에 못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거기다 지난 삶의 자욱이 있는  자리를 찾아가는 추억여행은 더 좋지 않겠어요?

 

소생은  양평  용문산 자락에서 첫 군생활을 하였습니다.

         수년 전부터   양평 용문산 산행을 하면 그 때의 병영을  한 번 찾아 보리라 꿈꾸고 있었습니다..

지난 주에 용문산을 오르는 길에  행복하게도  이 꿈이 이뤄졌습니다.

사전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간 저에게 군번과 성명 확인만으로  

초면식인 후배장교 김동균중위가  큰 은헤를 베풀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소생의  어설픈 글과  빛바랜 사진들이 뒤섞인 풍경에  

여러분들의 젊은 소시적 빛나는 추억을 '오버랲' 시키시어

 우리 젊은  좋았던  40년전의 추억여행을 해보는 것입니다.

 

이제 초로에 접어든 우리들  대부분은 그 때 그 시절,

 국방의 '신성한 의무'라는 명제 앞에  

찍,짹 소리 없이 우리 젊은 좋은 날들을  군에서 보냈습니다,  

그 빛나는 시절의 추억을 아련하게 되새길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되어 용기를 내어 올립니다.  

 

 

 

 먼지 쌓인 40년 전의 군생활 앨범을 들춰 봤습니다.

 

 

일박하기로 작정코 양평에 도착했습니다.

 

 

동이 트는 양평 역 앞  모텔에서.. 기상청에서는 추위가 풀린다고 했으나  추웠습니다.

 

 

1969년 여름  무덥던 어느 날 .

 수송장교 인솔하에 바로 이  역광장 앞에 도열하여 기다리던 군트럭에 질서정연 하게 승차했었습니다.

사단 군악대의 우렁찬 군가연주를 뒤로 하고  트럭이 하나, 둘 빠져 나가자  도로는 지체없니   흙 먼지를

푸울~풀  날렸습니다.

40년 세월을 건넌  위 사진으로는 그 때의 이미지, 필을 도저히 꺼낼 수가 없었습니다.

 

 

육이오 때 최대 전투 중 하나가 '용문산 전투'여서, 40년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여기는 군인들이 많았습니다.

 

 

소생의 첫 부임지였던 포병대대 정문과 초소입니다.

길은 아스파르또로,  초소와 병영건물의 자재가 적벽돌 등으로 바뀐 것 말고는

익숙하고 반가운  그 때 그대로의 정경이었습니다.

 

 

소생에게는 애환이 짙게 벤 대대 정문 초소입니다.  

주둔부대가 옛 부대일리 없건만  아득한 세월너머로 같이 일했던 이들의  얼굴이 아른거립니다.

 

 

그랬었지요.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만  이 연기 맛이 낏내줬습니다.  

이제는 지구상에서 몰아낼 공공의 적이 되어 버린  연초가..

그 때는 위로였고, 청량제로 군사기진작에  적잖이 기여한 것이었습니다.

 

얼마 전부터 병영에서도  금연 장려책으로 담배를 사서 피워야 한다고..

지난 세월, 좋은 시절은 있었지요.  그 때  분명 담배는 무상 배급이었으니

 

 

나에게 뜻 박의  행운을 준 '정보장교님, 정보장교님, 우리 정보장교님' 입니다.

전날 저녁 늦게 두려움을 누르며 어스름 덮힌 초소를  무작정 처들어가(?)  초병에게  

'군번, 주민번호, 이름'을 눈감고   외우면(ㅎㅎ) 신병이 확실한 거 아니냐고..실랑이를 하던 중  

김 중위가 구세주처럼 강림하신 것입니다.

 

물론  우연찮게 아득한  대학 후배였고, '바보티시' 출신이라는  프리미엄이 있었겠지만....

 

 

포차가 도열한 이 곳 대대 연병장에서 무면허로, 지엠씨 트럭을 몰며  

소생 처음 운전연습을 했다는 거 아닙니까?

참 정겨웠습니다.

 

 

우와~  처음 배속된  1(알파)포대 막사다. 저  회색문이 행정반 출입문이었습니다.

 

딱  40년전  그 해 겨울,

울 포대의 서울 명문대 출신 행정병 하나가  막사 뒤 무덤에 등을 뉘였다.

 총구를 목에 걸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는 병장이었고 약혼녀가 있었다.

그는 지독히도  순진했고, 여자를, 결혼을 교과서로만 알려고 했다.

 

'보좌관님!  거시기 털이 다 빠지는 것 같아요.'- 상상 성병 노이로제다.

'야 !  임질 매독도 다 문화야 임마! 신경 꺼!'

 

 

우하하~    위  행정반에서  근무하던 40년 전.  

양평옥에서 거의 매일 술시를  어긴 적이 없었는데   눈이 살아있네

그러길래 우리  젊은  좋은 날이었지.

 

 

아~  그 자리에  거의 그대로네...생생하다보면

아득한 추억은 진한 감동으로 소용돌이치는 것이구나.

 

'지금은 거긴 병사들이 살 곳이 못 됩니다.'

지금은! 그리고 병사도?

그렇지 세월은 엄청 흘렀고,  무지 잘(?) 살게 되었지.

 

밥풀떼기 하나 달고 처음 자대 배치 된 5명이   3개월 동안

기거했던  신입장교숙소(B.O.Q.) 자리다.

 

 

 

후배 김 중위에 물었다,  포사격장은?

'용문산 지봉인 백운봉 사격장 그대롭니다.'

타깃 이름 공알바위도 변치 않았남?

'엡!'

그 순간 나는 1969년 가을을 맞는  양평에 있었다.

 

 

낯 익어 정겨운 막사, 연병장, 초소, 신입장교 숙소는  40년전 그대로 의구헌데 

장비는 105미리(아래) 똥포에서,   155미리 컴 계산 자주포(위)로..

 

그 속에 인걸(?)도  강산을 뒤로 4번 넘어  의구하게 여기에 서 있습니다.

 

 

그 님이 티깃 방향각 계산지를  작성했다.

이젠 이름도 잊은  김 하사 그 님도 이 산하에서 아직  착하게 숨쉬고 계시겠지.

 

 

부대에서  15분 걸으면 발길 닫는 이 집 . 그 시절  니나노집 옥호야 흔했던 양평옥? 아니면 신내집(옥?)이었다.

저 집 지붕을  초가로  얹어  69년 여름을 그린다.  

탁베기에  얼큰해져 회가 동하면   수박 한 동이 들고 바로 옆 남한강으로 갔다.

전용 수영복이 될 법이나 한 시대냐!  

사낸 군용  홑빤스면 댓길이고, 양평옥  시약시는   튀튀헌 브라자만 걸쳤어도.. ..다!

꾸미지 않은 젊음이 받쳐 주는데야 요샛 아긔덜말로  색시도 왕 쌕쉬헌 그 니였다.

네 번 강산이 바뀐  위 사진으로야  이미지 컨텐츠가 여어~엉이지만,

밤 늦어   사위는 물소리 말고는  조용하지.

빛은 태고의 별빛 조명이지...

 

이리하야...  

몇 년후에는  그예  닥치고야 말   전주 '뚝越戰' 대비 수중훈련을 개시허능 거였다.

 

        양평옥 건너 해장국집의 주모 할멈 .

'  78년도에  문 열었을 때  술 색시장사하는 집  딱 세 곳 있었지 .. 사장님은 나보다  10년 전의 단골 주객이라..'

이 곳이  유명한 '양평해장국의 40년 원조랜다.    40년 세월이 덧없이 흐르진 않았구나.

단 두 니나노집이 있던 이 곳이 해장국 원조되어 경향에서 찾는  

관광지로 , 전원 펜션주택지로 되었다니..

 

게속해서 용문산 산행까지 갑니다.

 

 

 

 

출처 : mount1000
글쓴이 : 一雲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