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글과 사진 동영상

[스크랩] 감동의 참배 트레킹< 2 > -논산 성삼문 사당과 묘 -

一雲 2017. 10. 1. 23:08

(폰에서만 클릭하시기요.) 



     擊鼓催人命     격고   최인명이요.

    回頭日欲斜     회두  일욕사 러라

   黃泉無一店     황천 무일점 이러니 

今夜宿誰家     금야 숙수가

(적색 는 소생이 )

-  목숨을 재촉하는 북소리 둥둥 울리는데,

고개 돌려 바라보니 해가 바삐 지는구나.

저승에는 주막집 하나 없다 하니,

오늘밤은 뉘네 집에서 묵을 꺼나! -

----

죽음을 앞두고  읊은  노래

이른바 절명시(絶命詩)다.

사육신의 중심 인물 성 삼문이  

노량진 형터로 끌려가며 부른 절명시다.


잘 아시다시피

 

세조의 무도한 왕위 탈취에 목슴을 건

 저항 끝에  단종 복위에 실패,

예수의 십자가형 보다 절대잔혹의 끝판

 거열형으로  사지가 찢긴다.


눈앞으로 다가서는 죽음 앞에서

그 의연함이 얼음같이 차갑고,

불의를 내치는 그 뱃심은 처연하면서도

그윽하고, 인간 선의지에의 희망을 본다,


 




충남지역엔 선생의 후손과 유적이 많다.

선생은 충남 홍성 홍북면 노은리 외가에서

 태어나셨고 형제와 아들들

모두 처형되어 대가 끊기자

 종으로 간 부인과 둘째딸이

면노비 후 홍성으로 내려와

둘째 딸이 부친의 제사를 지냈다고.




대전의 구즉 도토리묵이 유명한데는 

당시 화를 피하여 후손들이 도토리,

상수리 나무가 많은 구즉의 산골로

숨어들어 농사는 못 하고  이를 주식으로

한 게 그 시작이라고,,,

지금도 구즉동은 昌寧 成氏 집성지다.



1.6km
NAVER
지도 데이터
© NAVER Corp. /OpenStreetMap

충남 문화재자료 81호로
지정된 사당과 묘의 위칩니다.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양촌리
(호남고속도로 논산 IC로 억세스. 소생처럼 
잔머리 굴려 양지로 들어가면 빙빙돕니다...) 



 

소생도 관향이 창녕이고, 26세손으로

가까운 이곳을 찾아 참배할 생각은

진즉부터 있었다. 차일피일하던 중,

이번 대전 현충원을 찾고서 부턴 조급해졌다.

'현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자리는

현충의 뜻을 옹골지게 나타내는

가까운 노량진의 사육신 형터와 

 묘가 직접적인  역할을 했다'는

말을 듣고  내달려 온 것이다. 

참  잘 왔다.



'검은 건 비의 바탕이요,

하얀 건 글씨드라 ㅎㅎ'

한문을 알아먹을 수가 있어야

뻥을쳐도 제대로 치지 원!

아무리 생각해도 한글전용 교육은

우리의 文,史,哲의 맥을 끊었다 싶다.


훈민정음 창제에 주된 역활을 하셨단

선생의 절명시도 한신디,,,


------

둘러 선 산도

 조용~

사당도 조용~

 주위의 잣나무 숲도

조용~

소생도 홀로 서서 조용~


 출입문을 보니 시건이 된 것 같아서


관리인 집인 듯 싶은 곳으로

조심스레 다가가

기척을 내면서 '계십니까?' 혔더만

여그도  '조~용~' 



군데군데 뺑끼(미안) 벗겨진

 내삼문으로 갔다.

우측 문을 미니 삐걱거리며 어렵게 열린다.





허~!

'충절 찾아 돌아드니

사람은 어디가고

잡초만 솟았는가'




소생은  절의와 현충의 표상으로서 

 성삼문이 아니라

지금 소생이 독수리 타법으로

찍는  편리한 자판 글자에 있다.

성삼문이 신숙주와 함께 요동을

13차례나 왕래하면서 그 곳에 유배와 있던

 명나라 학자 황찬(黃瓚)으로부터

음운학을 배워 오는 등

훈민정음을 만들 때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

 더 가치 있는 일이 아닐까.

(아래묘 해설 안내문 사진 참조)





묘소에 이르는 초입에 세워진

하마비(아래)와 신도비(위)


 선생의 일지총 묘는 형터인 노량진,

외가인 홍성 그리고 

이곳으로 세 곳인데 아무 

연고 없는 이곳 묘의 사연은 그저 여러

야그로만 ,,,,,, 

하나,

세조가  찢어진 시신를 온 나라에 

조리돌림의 명령설.

이 방향으로 온 시신의 지게꾼이 현재 묘 옆

구리재를  넘을 때  한 여름이라 무덥고  귀찮아
대역 죄인이므로 시신에 욕설을 퍼붓자 
 어디선가
 "기럼 아무 곳이나 묻어라."
하는 소리가 들려서 이 곳에 (믿거나 말거나다.)

둘,

 여산이 고향인 선생의 친구가 찟긴 시신 일부를 가져와 

여기에 묻었다고,,,

(둘은 돌아갈 쯤에 만난 사당 관리인의 설명)

 


하마비가 묘소로 오르는 입구에 서있고

좌우로는

잣나무숲이 보기 좋게 우거졌는데,

멀리 들고양이 한마리 우두커니

 소생을 처다본다


사당도 그렇거니와  이묘소로 가는 길은

잡풀이 커져 뱀이라도 나올까

싶어 조심조심 올랐다.

-----

 종씨 관리인 말을 빌리면 묘소길을

덮은 잣나무를 벌목해달라  논산시에

 부탁 했는데 아래 쪽 가지치기만

했다고 불만이 대단했다. .




一肢塚 이라!

지난 역사라 하지만,

인간이 인간에게 이리 잔혹할 수가,,,



묘는 생각보다 크고 정갈했다.




정중하게 배한다는 게 으째 어정쩡 헌 것이

 촌넘 티를 못 벗는구나!

(셀카봉를 어정쩡하게 고정코 자동 샸을 하다 보니,,)







 

'이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제 독야청청 하리라'

-----

한 겨울 이곳에 함박눈이 내리면 위

절의가의 분위기가 리얼하게

 느껴질 것 같았다.

(이 사진 인터넷에서) 


풍수로는  큰 뱀이 또아리를 튼 묘터라

들었다고 관리인 종씨가 알려준다,



내려오며

짠한 상념이 ,,,

허나

맴이 가벼워지며 착 가라 앉는다.

잘 왔다!


(거의 다 내려올 즈음해서  소나타다 싶은 차에서

내리는  종씨 관리인을 만났다.)


종씨 관리인이 홍성 생가에서

 옮겨 와 심었단 오동나무란다.

사당 옆은 통통하고 튼실한

벽오동으로 키워야 한다는디,

그러려면

일정 기간  밑둥을 잘라줘야

제대로 된 벽오동이 된다고,

관리사 종씨가 연신 댐배를 물며,

나이 들어 몸도 아프고,

문중의 재정 지원도 빈약혀서,

손을 못 봤단다.



현금 우리 주변에는 높은 학식(?), 명성,부 ,

그리고 관직을 지닌 자들이

불법과 불의를 서슴치 않는

심심치 않게 봅니다. 

일반 민초들의 소박한 상식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상황 논리'네 ,

'사랑과 관용'이네 하며

모듬살이 질서를 망치는 걸 봅니다.

문중의 조상이라서가 아니라,

선생은 시대의 오피니언 리더가

올곧은 삶을 살아가는 게  을매나

지난 하단 걸 여주고 있지롸!

그래도

각 시대의 상층 엘리트에는 기품있는 삶을 

산 조상들이 있었다는 걸  되새겨 

우리 역사에 희망을 가져도

좋을 것 같아 '참배 트레킹'이라 하여

올려봅니다.


---------

-시간 내시어 봐주셔서 감사합니당^!^-

내친 김에 한 번 더 <3>까지 가겠습니다.



출처 : "산천 친구들"
글쓴이 : 一雲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