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

[스크랩] 옛 군추억 여행도 곁들인 양평 용문산 산행기(1)

一雲 2010. 1. 19. 20:18

 

 

보시는 회원 님들께  조심 조심 사룁니다.

 

- 개인 블로그 용으로 맹근 개인적인 추억여행이어서  올릴까 말까 몇 번을 망설였습니다.-

 

 외국 여행도 좋거니와 우리 산하의 여행은 그에 못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거기다 지난 삶의 자욱이 있는  자리를 찾아가는 추억여행은 더 좋지 않겠어요?

 

소생은  양평  용문산 자락에서 첫 군생활을 하였습니다.

         수년 전부터   양평 용문산 산행을 하면 그 때의 병영을  한 번 찾아 보리라 꿈꾸고 있었습니다..

지난 주에 용문산을 오르는 길에  행복하게도  이 꿈이 이뤄졌습니다.

사전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간 저에게 군번과 성명 확인 만으로  

초면식인 후배장교 김동균 중위가  큰 은헤를 베풀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어설픈 글과  빛바랜 사진들이 뒤섞인 이 자료 속에  

여러분들의 젊은 소시적 빛나는 추억을 '오버랲' 시키시어

 우리 젊은  좋았던  40년전의 추억 여행을 해보는 것입니다.

 

이제 초로에 접어든 우리들  대부분은 그 때 그 시절,

 국방의 '신성한 의무'라는 명제 앞에  

찍,짹 소리 없이 우리 젊은 좋은 날들을  군에서 보냈습니다,  

그 빛나는 시절의 추억을 아련하게 되새길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되어 용기를 내어 올립니다.  

 

 

 

 먼지 쌓인 40년 전의 군생활 앨범을 들춰 봤습니다.

 

 

일박 하기로 작정코 양평에 도착했습니다.

 

 

동이 트는 양평 역 앞  모텔에서.. 기상청에서는 추위가 풀린다고 했으나  추웠습니다.

 

 

1969년 여름  무덥던 어느 날 .

 수송장교 인솔하에 바로 이 역 광장에 도열해 있던 군트럭에 질서정연 하게 승차했었습니다.

하나 차 승차 끝!

둘 차 승차 끝!

사단 군악대의 우렁찬 군가연주를 뒤로 하고  트럭이 하나, 둘 빠져 나가자  그 시절 도로는 흙 먼지를

푸울~풀  날리고 금새 얼굴에는 뿌옇게 먼지가 쌓였더랬습니다.

 

40년 세월을 건넌  위 사진이 그런 궁한 때는 없었다고 딱 잡아뗍니다그려.

 

 

육이오 때 최대 전투 중 하나가 '용문산 전투'여서, 40년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여기는 군인들이 많았습니다.

 

 

소생의 첫 부임지였던 포병대대 정문과 초소입니다.

길은 아스팔트로,  초소와 병영건물의 자재는 적벽돌로 바뀐 것 말고는

익숙하고 반가운  그 때 그대로의 정경이었습니다.

 

 

소생에게는 애환이 짙게 벤 대대 정문 초소입니다.  

주둔부대가 옛 부대일 리 없건만  아득한 세월 너머로 같이 일했던 이들의  얼굴이 아른거립니다.

 

 

그랬었지요.

 열심히 땀흘린 후 꽁초까지 나눠피던 연기 맛을 기억하십니까?  

이제는 지구상에서 몰아낼 공공의 적이 되어 버린  연초가..

그 때는 위로였고, 청량제였으며  군사기 진작에  적잖이 기여한 것이었습니다.

 

 얼마 전부터 병영에서도  금연 장려책으로 담배를 사서 피워야 한다고

김 중위가 말하네요.

 

좋은 지난  시절이었지요.  그 시절   담배는 분명 무상 배급이었으니까요.

 

 

나에게 뜻 밖에  행운을 준 '정보장교님, 정보장교님, 우리 정보장교님' 입니다.

전날 저녁 늦게 두려움을 누르며 어스름 덮힌 초소를  무작정 처들어가(?)  초병에게  

'군번, 주민번호, 이름'을 눈감고   외우면(ㅎㅎ) 신병이 확실한 거 아니냐고..실랑이를 하던 차  

구세주처럼   김 중위가  강림하신 것입니다.

 

물론  우연찮게 아득한  대학 후배였고, '바보티시' 출신이라는  프리미엄이 있었겠지만....

 

 

포차가 도열한 이 곳 대대 연병장에서 무면허로, 지엠씨 트럭을 몰며  

소생 처음 운전연습을 했다는 거 아닙니까?

 

참 정겨웠습니다.

 

 

소생의  1(알파)포대 막사임다. 저  회색문이 행정반 출입문이었습니다.

 

딱  40년전  그 해 겨울,

 서울 명문대 출신 행정병 하나가  막사 뒷 산 무덤에

등을 뉘이고는 총구를 목에 댑니다.

 이윽고,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탕!

 

그는 곧 제대할 병장이었고 약혼녀가 있었습니다.

 지독히도  순진했던(?) 그는 여자를, 결혼을 교과서로만 알려고 했습니다.

 

'보좌관님!  거시기 털이 다 빠지는 것 같아요.'- 상상 성병 노이로제였습니다.

 

'야 !  쌔캬!  임질도 매독도 다 문화야 임마! 신경 꺼!'

 

 

   위  행정반에서  근무하던 40년 전 소생입니다.  우하하~

매일 술시를  어기지 않고 양평옥에서 갔었는데도   눈이 살아있습니다.

 

그러길래 우리  젊은  좋은 날이었나 봅니다.

 

 

아~  그 자리에  거의 그대로네...넘 생생하다보면

아득한 추억도  진한 감동으로 소용돌이치나 봅니다.

 

'지금은 그곳에 병사들이 생활할 수 없습니다.'

지금은! 

병사들?

그렇지!  세월은 엄청 흘렀고,  무지 잘(?) 살게 되었습니다그려.

 

밥풀떼기 하나 달고 처음  3개월 동안

기거했던  신입 장교숙소(B.O.Q.) 건물임다.

 

 

 

후배 김 중위에게 물었다, 

 포사격장은?

'용문산 지봉인 백운봉 사격장 그대롭니다.'

 

타깃 이름 공알바위도 변치 않았남?

'옙!'

 순간,

 

 나는 가을이 지나는  1969년의 양평에 있었습니다.

 

 

낯 익어 정겨운 막사, 연병장, 초소, 신입장교 숙소는  40년 전 모습그대로 의구헌데 

장비는 105미리(아래) 똥포에서,   155미리 컴 계산 자주포(위)로 바뀌고

 

그 속에 인걸(?)도  강산을 뒤로 4번 넘어  의구하게 여기에 바로 위에 서 있습니다.

 

 

김하사 그가 타깃 포격 방향각계산지(TAG)  작성  책임사병이었습니다.

잘 못 떨어져 민가 피해가 간혹 있었습니다. 

이젠 이름도 잊은 그.

 

 참 군인이 되겠단 김 하사님!

우리 산하에서 아직  착하게 숨쉬고 계시지요?

 

 

 

       

부대에서 걸어 15분인 이곳의  해장국집의 주모 할멈 .

 

'  78년도에  문 열었을 때  술 색시장사하는 집  딱 세 곳 있었지 ..

 사장님이 나보다  10년 전 이곳 단골 주객였다고라..'

 

이 곳이  유명한 '양평해장국의 40년 원조랍니다.    

40년 세월이 덧없이 흐르진 않았나 봅니다.

단 두 집- 니나노집이 있던 이 곳이 해장국의 원조되어

경향에서 찾는  관광지로 , 전원 펜션주택지로 되었답니다.

 

다.

 

위 해장국집 할머님 말쌈이 들려도 똑똑히 들릴 길 건너  이 집 .

그 시절  니나노집 옥호야 흔했던 양평옥? 아니면 신내집(옥?) 아니겠습니까?

 

-저 집 지붕을  초가로  얹어  69년 여름을 그려봅니다.  -

 

탁베기에  얼큰해져 회가 동하면   수박 한 동이 들고 

바로 옆 남한강으로 갔습니다.

 

전용 수영복이 될 법이나 한 시대였습니까!  

사내는 군용  홑 빤스면 댓길이고, 

양평옥  시약시는   튀튀헌 브라자만 걸쳤어도..!

 

꾸미지 않은 젊음이 받쳐 주는데야

요새 아긔덜 말로  색시도 왕 '쌕쉬헌' 그녀 였습니다.

 

(네 번 강산이 바뀐  위 사진으로야  분위기 여어~엉이지만,,,)

 

 밤 늦어   사위는

 

흐르는 강물소리 말고는  조용하지요.

빛은 태고의 별빛 조명이지요...

 

이리하야... 

 

몇 년후에  그예  운명적으로 닥치고야 말  

전주 '뚝越 戰' 대비 수중훈련을 개시허능 거였습니다. ㅎㅎㅎ

 

계속해서 용문산 산행까지 갑니다. 

 

 

출처 : mount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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