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옛 군추억 여행도 곁들인 양평 용문산 산행기(1)
보시는 회원 님들께 조심 조심 사룁니다.
- 개인 블로그 용으로 맹근 개인적인 추억여행이어서 올릴까 말까 몇 번을 망설였습니다.-
외국 여행도 좋거니와 우리 산하의 여행은 그에 못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거기다 지난 삶의 자욱이 있는 자리를 찾아가는 추억여행은 더 좋지 않겠어요?
소생은 양평 용문산 자락에서 첫 군생활을 하였습니다. 수년 전부터 양평 용문산 산행을 하면 그 때의 병영을 한 번 찾아 보리라 꿈꾸고 있었습니다.. 지난 주에 용문산을 오르는 길에 행복하게도 이 꿈이 이뤄졌습니다. 사전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간 저에게 군번과 성명 확인 만으로 초면식인 후배장교 김동균 중위가 큰 은헤를 베풀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어설픈 글과 빛바랜 사진들이 뒤섞인 이 자료 속에 여러분들의 젊은 소시적 빛나는 추억을 '오버랲' 시키시어 우리 젊은 좋았던 40년전의 추억 여행을 해보는 것입니다.
이제 초로에 접어든 우리들 대부분은 그 때 그 시절, 국방의 '신성한 의무'라는 명제 앞에 찍,짹 소리 없이 우리 젊은 좋은 날들을 군에서 보냈습니다, 그 빛나는 시절의 추억을 아련하게 되새길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되어 용기를 내어 올립니다.
먼지 쌓인 40년 전의 군생활 앨범을 들춰 봤습니다.
일박 하기로 작정코 양평에 도착했습니다.
동이 트는 양평 역 앞 모텔에서.. 기상청에서는 추위가 풀린다고 했으나 추웠습니다.
1969년 여름 무덥던 어느 날 . 수송장교 인솔하에 바로 이 역 광장에 도열해 있던 군트럭에 질서정연 하게 승차했었습니다. 하나 차 승차 끝! 둘 차 승차 끝! 사단 군악대의 우렁찬 군가연주를 뒤로 하고 트럭이 하나, 둘 빠져 나가자 그 시절 도로는 흙 먼지를 푸울~풀 날리고 금새 얼굴에는 뿌옇게 먼지가 쌓였더랬습니다.
40년 세월을 건넌 위 사진이 그런 궁한 때는 없었다고 딱 잡아뗍니다그려.
육이오 때 최대 전투 중 하나가 '용문산 전투'여서, 40년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여기는 군인들이 많았습니다.
소생의 첫 부임지였던 포병대대 정문과 초소입니다. 길은 아스팔트로, 초소와 병영건물의 자재는 적벽돌로 바뀐 것 말고는 익숙하고 반가운 그 때 그대로의 정경이었습니다.
소생에게는 애환이 짙게 벤 대대 정문 초소입니다. 주둔부대가 옛 부대일 리 없건만 아득한 세월 너머로 같이 일했던 이들의 얼굴이 아른거립니다.
그랬었지요. 열심히 땀흘린 후 꽁초까지 나눠피던 연기 맛을 기억하십니까? 이제는 지구상에서 몰아낼 공공의 적이 되어 버린 연초가.. 그 때는 위로였고, 청량제였으며 군사기 진작에 적잖이 기여한 것이었습니다.
얼마 전부터 병영에서도 금연 장려책으로 담배를 사서 피워야 한다고 김 중위가 말하네요.
좋은 지난 시절이었지요. 그 시절 담배는 분명 무상 배급이었으니까요.
나에게 뜻 밖에 행운을 준 '정보장교님, 정보장교님, 우리 정보장교님' 입니다. 전날 저녁 늦게 두려움을 누르며 어스름 덮힌 초소를 무작정 처들어가(?) 초병에게 '군번, 주민번호, 이름'을 눈감고 외우면(ㅎㅎ) 신병이 확실한 거 아니냐고..실랑이를 하던 차 구세주처럼 김 중위가 강림하신 것입니다.
물론 우연찮게 아득한 대학 후배였고, '바보티시' 출신이라는 프리미엄이 있었겠지만....
포차가 도열한 이 곳 대대 연병장에서 무면허로, 지엠씨 트럭을 몰며 소생 처음 운전연습을 했다는 거 아닙니까?
참 정겨웠습니다.
소생의 1(알파)포대 막사임다. 저 회색문이 행정반 출입문이었습니다.
딱 40년전 그 해 겨울, 서울 명문대 출신 행정병 하나가 막사 뒷 산 무덤에 등을 뉘이고는 총구를 목에 댑니다. 이윽고,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탕!
그는 곧 제대할 병장이었고 약혼녀가 있었습니다. 지독히도 순진했던(?) 그는 여자를, 결혼을 교과서로만 알려고 했습니다.
'보좌관님! 거시기 털이 다 빠지는 것 같아요.'- 상상 성병 노이로제였습니다.
'야 ! 쌔캬! 임질도 매독도 다 문화야 임마! 신경 꺼!'
위 행정반에서 근무하던 40년 전 소생입니다. 우하하~ 매일 술시를 어기지 않고 양평옥에서 갔었는데도 눈이 살아있습니다.
그러길래 우리 젊은 좋은 날이었나 봅니다.
아~ 그 자리에 거의 그대로네...넘 생생하다보면 아득한 추억도 진한 감동으로 소용돌이치나 봅니다.
'지금은 그곳에 병사들이 생활할 수 없습니다.' 지금은! 병사들? 그렇지! 세월은 엄청 흘렀고, 무지 잘(?) 살게 되었습니다그려.
밥풀떼기 하나 달고 처음 3개월 동안 기거했던 신입 장교숙소(B.O.Q.) 건물임다.
후배 김 중위에게 물었다, 포사격장은? '용문산 지봉인 백운봉 사격장 그대롭니다.'
타깃 이름 공알바위도 변치 않았남? '옙!' 순간,
나는 가을이 지나는 1969년의 양평에 있었습니다.
낯 익어 정겨운 막사, 연병장, 초소, 신입장교 숙소는 40년 전 모습그대로 의구헌데 장비는 105미리(아래) 똥포에서, 155미리 컴 계산 자주포(위)로 바뀌고
그 속에 인걸(?)도 강산을 뒤로 4번 넘어 의구하게 여기에 바로 위에 서 있습니다.
김하사 그가 타깃 포격 방향각계산지(TAG) 작성 책임사병이었습니다. 잘 못 떨어져 민가 피해가 간혹 있었습니다. 이젠 이름도 잊은 그.
참 군인이 되겠단 김 하사님! 우리 산하에서 아직 착하게 숨쉬고 계시지요?
부대에서 걸어 15분인 이곳의 해장국집의 주모 할멈 .
' 78년도에 문 열었을 때 술 색시장사하는 집 딱 세 곳 있었지 .. 사장님이 나보다 10년 전 이곳 단골 주객였다고라..'
이 곳이 유명한 '양평해장국의 40년 원조랍니다. 40년 세월이 덧없이 흐르진 않았나 봅니다. 단 두 집- 니나노집이 있던 이 곳이 해장국의 원조되어 경향에서 찾는 관광지로 , 전원 펜션주택지로 되었답니다.
위 해장국집 할머님 말쌈이 들려도 똑똑히 들릴 길 건너 이 집 . 그 시절 니나노집 옥호야 흔했던 양평옥? 아니면 신내집(옥?) 아니겠습니까?
-저 집 지붕을 초가로 얹어 69년 여름을 그려봅니다. -
탁베기에 얼큰해져 회가 동하면 수박 한 동이 들고 바로 옆 남한강으로 갔습니다.
전용 수영복이 될 법이나 한 시대였습니까! 사내는 군용 홑 빤스면 댓길이고, 양평옥 시약시는 튀튀헌 브라자만 걸쳤어도..!
꾸미지 않은 젊음이 받쳐 주는데야 요새 아긔덜 말로 색시도 왕 '쌕쉬헌' 그녀 였습니다.
(네 번 강산이 바뀐 위 사진으로야 분위기 여어~엉이지만,,,)
밤 늦어 사위는
흐르는 강물소리 말고는 조용하지요. 빛은 태고의 별빛 조명이지요...
이리하야...
몇 년후에 그예 운명적으로 닥치고야 말 전주 '뚝越 戰' 대비 수중훈련을 개시허능 거였습니다. ㅎㅎㅎ
계속해서 용문산 산행까지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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